현상학적 언어로 풀어가는 삶의 터
Topographical Clearing: A Phenomenological Approach to Dwelling
이 한옥을 설계하는 동안 다양한 현상학적 단상들이 떠올랐다. 건축물은 작가가 담아내려는 ‘의미’를 지시하는 기호, 상징 또는 은유와 같은 재현이 아니라, 사방(fourfold)과 같은 존재의 기저가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도록 도와주는 ‘열린 터 (clearance)’라는 마틴 하이덱거의 철학이 먼저 떠올랐다. 근경과 원경을 초현실주의자처럼 덧이었던 르꼬르뷔지에, 방들을 겹쳐 깊이와 내밀함을 만들어낸 아돌프 루스, 신체성에 기초한 공간을 디자인했던 리차드 노이츄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를 조합하며, 미학의 틀 대신 윤리적 자유를 추구했던 알바 알토가 떠올랐다. 하나같이 한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단상들인데도 무한한 영감을 주었다. 동굴처럼 빛이 침잠한 지하층에 자리 잡은 내부마당을 지나 위로 솟아오르는 순간, 앞채의 용마루 너머로 산이 들어오고, 습기가 낀 몬순의 어슴푸레한 하늘이 드러난다. 이 도정을 따라 앞마당, 내부마당, 뒷마당, 찜질방, 안방, 건넛방, 옥상마당 등 다양한 공간을 배치하였다. 동질의 한 논리가 지배하는 순수결정이 아니라, 어느 입체파 화가의 콜라주처럼, 서로 다른 상황들이 만나 적층을 이루고, 상호차이에 의해 서로를 지탱하기에,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이 곳 저 곳으로 숨어들고 안기는 것이 가능하도록 배려하였다. 위상기하학의 토폴로지(topology)가 아니라, 삶의 다양한 양상을 담아내는 ‘차이’의 네트워크, 즉 토포그라피(topography)를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창의건설과의 협업을 통해 대지 전면에 위치한 기존 주택과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원경과의 관계를 최적화하기 위해 전통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부채꼴 형상의 채를 개발할 수 있었다. 또 기존 한옥의 문제인 기밀성 확보를 위해 전체 벽면이 일체화 된 우레탄폼 단열시공을 하고, 이를 통해 외부공간과 다양한 관계를 연출해 내면서도, 최대한 단열문제가 해결되도록 고려하였다.